당신이 창작을 하고 싶다면 무엇부터 시작할 것인가? 좋은 도구를 사야 할까? 명문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들어야 할까? 그 무엇도 명확한 답이 되진 않겠지만, <룩백>은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는 창작자의 뒷모습이 얼마나 숭고한지를 스크린을 통해 보여준다. 또한 창작의 길에서 절망을 느껴 좌절 중이거나 매너리즘에 빠져 더는 열정을 끌어올릴 수 없는 세상 어딘가의 창작자들에게 헌사를 보내는 영화다.
줄거리
어느 시골의 초등학교 4학년인 ‘후지노’는 학급 신문에 4컷 만화를 매주 연재하고 있다.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 만화를 연재한다는 것은 아이들 사이에서 무척 대단한 일이다. 가족들과 친구들 모두 후지노의 만화를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자신의 재능에 취해 있는 후지노는 별 거 아니라는 듯한 태도로 주변 사람들의 칭찬에 답변하지만 후지노의 눈빛은 만화를 그릴 때 가장 반짝인다.
어느 날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부탁을 받게 되는데 등교 거부를 하는 동급생 ‘쿄모토’가 집 밖으로 나오지 않고 만화를 그리고 싶다고 해서 후지노와 같이 연재할 수 있도록 지면을 양보해달라는 것이었다. 후지노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고 “학교도 못 나오는 나약한 애가 제대로 된 만화를 그릴 수 있을 리가 없다” 며 비아냥댔다. 아마도 어린 나이에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아 세상이 자기중심이라고 착각하는 아이의 흔한 자아도취 상태인 것이다. 그 후로 쿄모토와 함께 2인 체재로 연재하게 된 첫 학급 신문이 나오는데 후지노는 쿄모토의 만화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 마치 옛날 만화책처럼 정밀한 배경 묘사로 가득해서 이미 초등학생의 레벨이 아니었다. 옆자리 아이는 쿄모토의 만화에 비하면 후지노의 만화가 평범하다는 말을 해버리는데 어린 마음에 그런 가벼운 평가도 세상에서 홀로 떠안은 재앙처럼 느낀 후지노였다.
이대로는 만화를 그려봤자 창피만 당할 거라고 여긴 후지노는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 이거야” 라는 심정으로 그림에 대한 책을 사고 신체 묘사의 기초부터 그림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놀러 갔을 때, 거실에서 가족들이 TV를 볼 때도 후지노는 책상에 붙어서 사람들을 등진 채 만화를 그렸다. 그렇게 계절이 바뀌어도 만화에 몰두하는 후지노의 뒷모습은 변치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후지노의 그림 실력은 계속해서 상승했고 만화도 계속 연재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만화를 그리는 후지노의 눈이 빛나지 않기 시작했다. 중학교 진학을 앞에 두고 있는 6학년이 되어서 한 친구가 중학교 들어가서도 만화만 그리면 오타쿠 취급을 받을 거라고 핀잔을 줬다. 후지노는 문득 왜 이렇게까지 만화를 그렸는지 모르게 됐고 여전히 함께 연재하고 있는 쿄모토의 만화를 유심히 보고는 “이제 그만둬야겠다”라고 하며 펜을 내려놓는다.
만화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간 후지노는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담임 선생님이 후지노에게 마지막 부탁을 하는데 그건 바로 쿄모토에게 졸업장을 전달해달라는 것이었다. 한 번도 얼굴을 본 적도 없고 자신을 만화에 몰두하게 만들고 그만두게 만들기도 한 장본인을 찾아간다는 게 썩 탐탁지 않은 후지노였지만, 이제 더는 볼 일이 없을 테니 후지노는 받아들였다. 그렇게 쿄모토의 집에 방문한 후지노는 거기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듣게 된다.
창작은 왜 하는걸까?
창작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어떤 도구를 사는 게 좋을지 고민할 때가 많지만 사실은 그 자리에 계속 앉아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작업실, 책상, 컴퓨터와 캔버스 앞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 있어야 한다. <룩백>은 만화를 그리기 위해 두 주인공이 어떤 삶을 사는지를 보여준다. 말없이 뒷모습만 보여주는 장면들이 이어지지만 때로는 귀로 들리는 말보다 눈으로 보이는 행동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관객은 자연스럽게 “저렇게까지 한 가지에 몰두하는 이유와 그 심정은 무엇일까”라는 궁금증이 떠오른다. 그리고 현실에서 창작을 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뒷모습과 자신을 겹쳐보며 복잡한 감정이 들었을 것이다. 이윽고 “왜 나는 저렇게 끈기 있게 하지 못했나” 라며 반성하게 된다.
영화는 언뜻 미련해 보일지라도 작품에 열정을 쏟는 창작자의 모습 자체가 이 일의 아름다운 부분 중 하나라는 것을 알려준다. 매일 일을 하다 보면 “내가 이 일을 왜 하게 됐지?”라는 생각이 문득 들 때가 있다. 창작은 곧 육체노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만화를 예로 들면 한 컷에 그림과 스토리를 압축해서 그려야 하고 연재를 하게 된다면 마감에 시달리며 책상에 붙어있어야 할 것이다. 창작의 범주에 들어가는 다른 모든 분야도 그렇다. 머릿속에 있는 상상을 현실에 구현하려면 물리적인 노력이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몸과 마음에 한계가 오면 비효율적이고 어려운 일은 피하고 싶어 진다. 그렇게 회피하다 보면 “나는 재능이 없구나” 라며 포기에 이르게 된다. 예술분야를 전공하면서 이러한 사례는 주변에서 숱하게 봐왔다. 게다가 나 역시도 이따금씩 그런 생각에 빠져선 우울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후지노와 쿄모토는 어려운 과정들을 기꺼이 하면서 착실하게 자신들만의 영역을 구축해 간다. 단순히 그들이 재능 있는 천재여서가 아니다. 후지노의 등과 수북이 쌓인 쿄모토의 노트를 보면 천재니까 가능하다는 말을 꺼내긴 어렵다. 재능 이전에 후지노와 쿄모토는 서로가 곧 팬이자 뮤즈였다. 작품을 봐주는 사람이 내 앞에서 들뜬 표정을 지을 때 느끼는 희열감은 창작의 노고를 잊고 나아가게 해주는 큰 원동력이다. 그 희열감을 느꼈다면 창작은 이제 숙명과도 같은 업이 된다. 누군가를 기쁘게 한다는 것은 더없이 순수한 동기니까.
감상평
이토록 감성을 자극하는 작품은 오랜만이어서 아주 반가웠다. 마치 어린 시절 책방에서 우연히 꺼내든 만화책에 푹 빠져 본 느낌이었다. 감수성을 자극하는 작화와 연출로 원작의 스토리와 메시지를 충실하게 영상화했다. 후지노와 쿄모토의 나들이 장면에서 언뜻 퀴어물 느낌이 나서 그쪽으로 가는 건가 싶었지만 10대 소녀들의 순도 높은 애정을 표현했다고 생각해 보면 그저 어른의 편견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순수함이란 감정이 우리 삶에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곱씹어 볼 수 있는 작품. 지금 내 삶과 일이 힘들고 너무나 막막한 감정이 가득하다면 꼭 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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